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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lvin
영어를 배우면 최소한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지잖아요. 비단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든 일 할 수 있으니깐, 그만큼 일자리가 많아지는 거죠. 아, 물론 미국, 캐나다 같은 곳만 염두하고 얘기 하는 건 아니에요. 인도나 중국, 그 외 많은 나라에서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잖아요.
취업을 위해 영어공부를 한다는 캘빈은. 확실한 목적이 있어서일까? 좀 더 여유롭게 영어공부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빽빽한 일과를 소화해내고 있었다.
Kelvin
아무래도 제 나이가 취업을 가장 많이 생각할 나이니깐 싫어도 취업 걱정을 하게 되죠. 하루 일과는, 아침 8시 정도에 일어나서, 인터넷으로 한국어로 된 강의를 보고, 10시부터 두 시간 투터를 하고, 점심 식사 후 또 다시 두 시간 투터를 하죠. 그 후엔 저녁 식사 전까지 다시 한국어로 된 강의를 봐요. 그럼 금방 저녁 식사 시간이 되죠. 그 후엔, 그날 배웠던 내용, 까먹기 전에 복습을 하고. 잠들죠. 대충 이런 일정이에요. 아, 대신 주말엔 놀아요. 마닐라 곳곳을 구경하기도 하고, 친구들 만나 술 한 잔도 하고, 마사지 받으러 가기도 하고. 가끔은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수영장에 가서 수영도 해요. 밖에 나가기 싫은 기분이 들면,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 놓은 한국 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같은 것도 보고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엔 가까운 곳이라도 좋으니, 여행도 가볼 생각이고요.
갑자기 루손섬을 여행 했던 기억이 났다. 바기오를 시작으로, 바나웨, 본토크, 사가다, 라왁 그리고 파굿풋까지. 지금은 산을 뚫은 터널도 생겨서 이동이 쉬워졌다고 하는데, 내가 루손섬을 여행할 때만 해도, 터널이 없어서 커다란 산을 뱅뱅 돌면서 평균 10시간은 버스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당시엔,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계속할까 싶기도 했는데,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내가 마닐라에 있는 동안 경험했던 수 많은 일들 중에 가장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캘빈에게도 얘기해주며 도전해 보라고 권했지만, 캘빈은 그렇게 많은 일정을 여행에 보낼 순 없다고 했다. 그냥 마닐라에서 가까운 민도르, 화이트비치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GHam
혹시, 마닐라 외, 가본 곳은 있어요?
Kelvin
아니요. 마닐라가 처음이에요. 그래도 여기 오래 있다 보니, 듣게 되는 정보는 많죠. 같은 하숙집에 머물던 사람 중에 세부에 있다 온 사람도 있고, 어학원에서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 중에선 바기오나 일로일로에 있다가 온 사람도 많으니깐요. 지금처럼 작가님을 통해 바나웨, 사가다 같은 곳도 듣게 되는 것처럼요.
GHam
마닐라 말고도, 영어공부를 위해 많이들 가는 곳은 어디에요?
Kelvin
세부죠. 세부의 장점은 역시, 바닷가가 있다는 사실이죠. 공부하다 지치면 바닷가 가서 그냥 놀다 오면 되잖아요. 마닐라는 항구 도시지만, 바닷가가 없잖아요. 마닐라에서 바닷가를 가려면, 최소 4시간은 달려야 하잖아요. 그 점은 아쉽죠. 대신 마닐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투터가 있고, 구하기도 쉽죠. 대신 물가는 다른 곳에 비해 좀 비싼 편이지만요. 바기오는, 마닐라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까? 너무 작아서 심심하죠. 일로일로는 물가는 조금 싸지만, 워낙 시골이라 놀게 하나도 없다고 해요. 마치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는 기분이랄까요? 정말 공부만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죠. 아, 물론, 전 마닐라에만 있어서 직접 경험한 건 아니에요. 주변에서 들어서 대충 알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캘빈은 왜 마닐라를 선택했을까? 지금처럼 죽어라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면, 일로일로를 선택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여행을 좋아한다고 하니, 세부는 어땠을까?
Kelvin
일로일로는 답답할 것 같아 싫지만, 다시 오게 된다면 세부를 택할 것 같아요. 그런데요. 제가 처음에 왔을 땐 지금처럼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않았어요. 주로 오기 전엔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 봐야 했는데, 솔직히 신뢰를 할 수 없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결정인데, 인터넷에 맡기고 싶진 않았어요. 직접 느껴야죠. 그래서 그냥 무작정 왔어요. 여기 와서 몸으로 직접 부닥치며 알아가자는 생각을 했죠. 그때만 해도 세부하면 휴양지를 떠올리게 되니깐, 아무래도 마닐라가 더 좋겠다 싶었고요.
캘빈은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었다.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처럼 적당한 직장에 들어가 적당히 월급 받고 살 것인가. 아니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모습으로 더 넓은 세계로 나갈 것인가.
문득, 갑자기 자신의 삶에서 영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 졌다. 적어도 지금까지 영어의 영자도 모르고 있다가 영어를 처음 접한 건 아닐 것이고,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만 봐도 적어도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었다는 의미다. 과연 한국에서 영어 공부는 어땠길래 이 먼 곳까지 와서 이토록 죽어라 영어공부를 하는 걸까?
Kelvin
한마디로 지겨웠죠. 시험을 위한 영어공부였으니깐요. 지금까지의 영어공부는 누가 시켜서 했다고 해야 하나? 하고 싶어서 했기 보다는 왜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했죠. 일단 내신 성적을 따야 하니깐 했고, 대학을 가야 하니깐 했죠. 즐겁지 않았어요. 단어, 숙어. 그러다 그냥 문장까지 통째로 외워야 했으니깐요.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한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과 사회에 나와서 까지, 얼추 10년 넘게 배웠던 영어는 영어가 아니라 암기였을 뿐이라는. 그래서 정해놓은 대본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말해 상대 배우가 애드리브라도 치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세상 그 어디에, 감정이 들어가지 않는 언어가 있단 말인가?
언어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내 생각, 내 느낌, 내 감정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방법인데, 내가 10년 넘게 배웠던 영어는 언어가 아니었다.
영어는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배워야 한다. 내가 한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한국인만 만나고 살겠는가. 조선시대도 아닌 글로벌 시대에 말이다. 물론, 세계엔 수 많은 언어가 있지만, 그 중에 유독 영어가 중요한 이유는, 언젠가부터 세계는 영어가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구사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으니깐, 영어를 배우는 것이다. 일본인을 만나도, 중국인을 만나도, 영어만 할 줄 안다면 어느 정도 대화는 통하니깐. 적어도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전달은 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약이 심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10년 넘게 죽어라 배운 영어는 죽은 영어였다. (영어의 영자만 들어도 스트레스를 받던 나를, 그래도 지금까지 열심히 이끌어주신 수많은 선생님들께는 죄송스런 말이지만)
Kelvin
맞아요. 죽은 영어.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나 생각해보면, 써먹을 수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토익에서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아도 외국 사람 만나면 한 마디도 못할 것 같고요. 읽고 쓰는 건 잘할지 몰라도, 전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살아있는 영어. 그걸 배우고 싶었어요.
GHam
그래서, 살아있는 영어는 많이 배웠나요?
Kelvin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확실해요. 외워서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거든요. 나 아닌 누군가가 미리 정해 놓은 대사를 뻐꾸기처럼 말하는 게 아니라, 내 머리 속에서 나오는 생각을 말하고 있는 거죠. 아,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게 생각났어요. 한국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이, 여기서는 안 통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깐 콩글리쉬인데 콩글리쉬인 걸 모르고 사용하다 알게 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우리는 보통 운동하는 곳을 헬스클럽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짐이라고 해야 해요. 여기선 헬스클럽이라고 하면 일종의 안마방을 떠올려요. 마사지 말고, 한국에 있는 안마방 있잖아요. 좀 안 좋은 곳을 떠올리더라고요. 언젠가 운동이나 시작할 생각으로 쇼핑몰에 가서 헬스클럽이 어디냐고 안내원에게 물었었거든요. 근데, 얼굴이 빨게지면서 화들짝 놀라더라고요. 그때 헬스클럽이 뭔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구나 알았죠. 아! 그리고 혹시 그린마인드라고 아세요?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그 단어를 들으면 환경을 생각하고 뭔가 예쁜 마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여기선 변태라는 의미에요. 뭐, 이런 식으로 황당한 경우가 종종 있죠. 그럴 때 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튼 재미있더라고요.
당연한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을 하면서도, 왜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로 가지 않고 마닐라로 왔는지를 물었다. 한국에 콩글리쉬가 있듯이, 필리핀엔 타글리쉬가 있으니깐. 아무래도 방금 얘기 했던 웃지 못할 해프닝이 여기서 영어 공부를 한다면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지 않겠냐 싶은 마음에서였다.
Kelvin
현실적인 문제가 걸렸죠. 미국, 호주, 캐나다.... 이런 곳이 더 좋다는 건 알죠. 하지만, 그런 곳에서 한 두 달 정도 머물 수 있는 비용이면, 여기선 정말 편하게 반년이나 그 이상도 머물 수 있으니깐요. 영어가 한 두 달 가지고 해결 할 수 있는 건 분명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가 네이티브스피커처럼 정확한 영어를 구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난 한국인이고, 한국인 특유의 발음이 섞인 영어도 영어니깐요. 아까 제가 외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네이티브스피커가 있는 나라는 아니고요. 그냥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가고 싶거든요. 예를 들어서, 전 마닐라에서도 일할 생각이 있어요.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마닐라를 선택했죠. 그리고 마닐라의 영어를 낮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던데요, 그만큼 나쁘진 않아요. 여기도 네이티브스피커 못지 않게 발음 좋은 투터도 있거든요. 물론, 많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마닐라가 사람이 많아서, 다른 지역 보다는 좋은 투터를 쉽게 구할 수 있긴 해요.
GHam
영어 말고, 다른 부분은 어때요?
Kelvin
음.... 낮과 밤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낮에 만나는 사람들을 밝고, 친절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면, 밤에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있고, 어둡고 그래요. 그 때문인지 낮에 보는 마닐라와 밤에 보는 마닐라는 전혀 다르더라고요. 내가 같은 곳에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마닐라가 필리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어둡잖아요. 가로등이 어두워서 그런가? 그것마저도 많지 않으니, 완전히 어둠의 도시죠. 그 때문에 더 마닐라의 밤이 음침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살아있는 영어를 좋아하는 데. 실제로 마닐라에 있으면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나 많은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영어보다는 타갈로그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 기회란 게 많지는 않을 듯싶었다.
Kelvin
맞아요. 그리고 제가 아무래도 외국인이다 보니, 현지인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고요. 투터를 통해서 친구를 소개 받는 정도에요. 아, 소개팅 이런 게 아니고 가끔 투터와 하숙집에서 가까운 바에서 술 한 잔 하곤 하거든요. 그때 근처에 친구가 있으면 오라고 해서 합석하는 정도에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알게 되는데요. 아무래도 그런 친구들은 직업이 투터가 아니니깐 영어 수준이 낮죠. 가끔은 저보다 영어를 못하는 친구를 만나기도 해요.
인터뷰 도중. 캘빈은 수업이 있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정도는 핑계를 대고 놀 법도 하건만, 자신이 정해 놓은 스케줄대로 소화해 내는 성실함이 보기 좋았다.
종종 걸음으로 돌아가는 캘빈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터뷰 중 그가 했던 얘기 하나가 귓가에 맴돌았다.
Kelvin
태어나자마자 영어 공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제 나이만큼, 영어를 공부 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동안 지금처럼 영어가 즐겁게 다가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여기서 제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영어에 대한 흥미를 얻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젠 어떻게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그 길도 보이고요.
그렇다. 영어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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